리뷰부자의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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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가 흐르는 밥알 위로 모락모락 아스라이 뜨거운 김이 오르는게 짜증날 때가 있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있다.

 

할 일 이 태산이라 빨리 먹고 사무실로 들어가봐야 하는 상황.

조금이라도 빨리 생존을 위한 식사를 해치우지 않으면, 내 책상이 곧 해치워질 수도 있다.

발을 동동구르다 다짜고짜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에 가져다 넣었는데 왠걸.

인두로 혓바닥을 지지는 것 만큼이나 뜨거운 밥알들이 혓바닥 위로 얹혀지는 순간,

너무 뜨거워서 혓바닥 천장으로 밥알을 목구멍으로 빨리 밀어 삼켜 넘긴다.

이걸로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판단이 들기도 전에, 긴급히 화재를 진압하듯 냉수를 벌컥벌컥 연거푸 들이킨다.

사레가 들린 것도 아닌데 이런 내가 가엽게 느껴져서 눈알에 눈물이 핑 고이는 그런 때가 있다.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인데... 도대체 사는게 뭐길래 나는 왜 이렇게 까지 해야하는가?'

 

 

 

이런 우리에게 소설가 김훈 씨의 대답은 지극히 냉혹하고 현실적이다.

 

모든 '먹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모든 포유류는 어금니로 음식을 으깨서 먹게 되어 있다. 지하철 계단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자장면을 먹는 걸인의 동작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냅킨을 두르고 거위간을 먹는 귀부인의 동작은 같다. 그래서 밥의 질감은 운명과도 같은 정서를 형성한다. 전기밥솥 속에서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울타리 안으로 불러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 김훈, <밥1>,<<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 2015) 중에서 -

 

그는 말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고. 죽는 날까지 밥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거리로 내몰려 밥을 벌어야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밥이 진저리나는 거라고. 그래서 밥익는 비린 향기에도 한평생 목이 메이는 거라고.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에는 격한 공감에 무릎을 탁하고 쳤다.

하지만 곰곰이 문장을 곱씹다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생각해보라. 인생의 5할 이상을 직장에서, 일터에서 보내야 하는 것이 우리내 인생이다. 그런데, 단순히 우리의 직업이나 꿈의 목적이 '밥벌이'에만 그친다면 얼마나 허무해지는가?

 

 

 

직업으로 대표되는 우리의 일, 그리고 꿈의 이유를 밥벌이에서만 찾을 때 생기는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위처럼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똑같이 밥을 벌어먹으려고 사는게 되버린다. 그런데 누구는 1시간만 일해도 한 달치 밥을 벌어내고, 누구는 하루 종일 내리 일해도 공깃밥 한 공기를 겨우 벌어낸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될 때. 그나마 따뜻한 밥 한 공기라도 벌어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 누군가는 편의점에서 1+1 행사가 걸리지 않으면 딱딱하게 굳어버린 인스턴트 햇반 하나 사는 것마저 벅차다. 

 

 

 

직업이나 꿈을 밥벌이로 생각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은 동창회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오랜만에 모인 동창회 자리를 나가면 우리 모두의 관심사는 대부분 타인의 '밥벌이'다. "3반 철수는 변호사가 되어 외제차를 끌고 다닌다더라", "우리 반 영희는 시집을 잘가서 인생이 폈다더라"하는 얘기를 다들 신나게 주고 받는다. 그러다 "짠" 소리와 함께 다같이 목구멍으로 소주를 털어 넣고, 빈잔을 보고있으면 뻘쭘하다가 이내 시무룩해진다.

 

마치 고유명사 앞에 붙는 관사 같이, 우리의 이름 앞에 붙는 직업이나 꿈의 가치가 남들보다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직업이나 꿈 위에 '밥벌이'라는 잣대를 들이밀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우리는 직업이나 지위에 따라 같은 시간에 벌어내는 밥의 공깃수가 달라진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우리는 죽자고 달려들며 각자의 밥그릇을 남의 것과 끊임없이 비교한다.

 

 

이처럼 직업이나 꿈을 '밥벌이' 수단이라고만 생각해버리면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밥벌이 능력(구체적으로 직업 연봉 등)을 타인의 그것과 비교하게 된다. 한 두번은 이기겠지만 분명히 언젠가는 질 수밖에 없는 게임판에 스스로를 몰아넣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저울 위에 기꺼이 스스로 올라 타게 된다. 하지만 저울이 우리쪽으로 기울건, 타인 쪽으로 기울건, 다시말해 이 무의미한 게임의 승자건 패자건 그 결과는 우리 모두에게 좋지 않다.

 

 

 

비교의 역설에 대해서 <뼈있는 아무말 대잔치>의 저자 신영준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이 비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해 제가 2행시를 지어보겠습니다.
비: 비참해지거나
교: 교만해지거나
여러분이 비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부분은 사실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비교합니다.

- <뼈있는 아무말 대잔치>, 신영준/고영성, 로크미디어, p50 -

 

그러니 우리는 직업이나 꿈 같은 것들이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더 이상 밥벌이가 우리의 존재가치를 규명하게끔 가만히 내버려 둬서는 안된다.

 

이에 대해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의 저자 정재찬 교수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다.

 

그런데, 지금 당장엔 그렇게 중요하게 보이는 의술, 법률, 사업, 기술 따위야말로 생의 목적은 아니랍니다. 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의사든 변호사든, 취업이든 창업인든, 빠르면 이십 대, 늦어도 삼십 대에는 이루어지든가, 아니면 영영 내 인생과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인생의 목표가 젊은 날 그렇게 일찍 이루어지거나 혹은 그렇게 일찍부터 목표달성을 포기해야 한다면, 남은 긴 여생은 도대체 무얼 하며 살아야 하는 겁니까. 우리의 꿈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어야 할 지 모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무엇인가'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 무엇은 명사겠지요. 의사, 교사, 공무원, 회사원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 가령 명사 '교사'는 정말 이삼십 대 안에 되든지 안되든지가 결정이 납니다. 하지만 가령 형용사 '존경스러운' 교사는 정년까지도, 아니 평생토록 이루기 힘듭니다. 생의 목표는 그런게 되어야 하지 않을는지요. 어쩌면 '존경스러운' 사람이 되는게 내 꿈이고 '교사'나 '의사' 따위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일지도 모릅니다. '의사'가 되었어도 환자나 주변으로부터 평생 존경을 얻지 못했다면 그 인생을 어찌 성공한 인생이라 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라면 시 같은, 아름다운, 낭먼적인, 살아이 넘치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목표여야 하지 않을까요?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정재찬, 인플루엔셜, p52 -

 

 

김훈씨의 말처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밥을 먹어야 생존하게끔 설계된 동물이다.

하지만 우리의 직업이나 꿈이 단순 밥벌이에 그쳐 버리면 이내 불행하고 허무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직업이나 꿈을 어떻게 인식해야 바람직할까? 정재찬 교수의 말이 그 힌트가 될 수 있다.

 

밥벌이를 넘어서, 명사가 아닌 형용사로 각자의 꿈과 직업을 다시 재조정하자. 그렇게 하면 비교의 철장 밖으로 뛰쳐나올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며 일과 꿈을 차곡차곡 높여나가는 것. 그게 우리 모두의 인생이 한결 나아지는 방향일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06R8FdoJAzI&t=44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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