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부자의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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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있는 브랜드의 철학]

 

고집있는 브랜드를 좋아한다.

 

고집이 있다는 것은 철학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굳건한 철학이 있는 브랜드는 멋지다.

오늘 날, 시시각각 빠르게 변화하는 비즈니스 생태계 속에서 하루 아침이 다르게 수없이 많은 브랜드들이 태어났다가 사라진다.

이러한 트렌드의 급류 속에서도 자신만의 자리를 지키면서 꿋꿋이 버티는 브랜드가 있다.

 

이들은 빠르게 흘러가는 급류가 매섭게 몰아쳐도 자신의 자리를 꿋꿋이 지키며 버티고 서있는 바위같다. 이들은 결코 트렌드에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Product와 Value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감,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확신. 그렇게 겸허함 속에 야심을 감추고 있어서 그들의 매력은 더욱 빛난다. 따라서 고집있는 브랜드는 긴 시간과의 싸움에서 늘 이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고집있는 브랜드가 변화를 도모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급류 속에서 자리를 지키는 바위는 계속 그 자리에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표면이 매끄럽게 다듬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메가트렌드를 주도하는 수많은 브랜드들이 높게 성벽을 쌓아 올렸다가 모래성처럼 무너지기를 반복할 때, 고집있는 브랜드는 자신의 철학과 가치를 매끄럽게 가다듬으며 되려 더욱 단단해진다.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변하지 않는 것.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심을 유지하되 가지에 변주를 주면서 더욱 빛나는 가치를 가다듬는 커다란 고목 같은 것.

 

우리는 이러한 브랜드를 클래식 (Classic)이라고 부른다.

 

데님에 있어 클래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 치의 고민 없이 아페쎄 (A.P.C)라고 대답하고 싶다.

 

나는 워낙에 청바지를 좋아해서 많은 브랜드의 데님을 경험했다. 세계 최초의 청바지 리바이스 (Levis)의 501 모델부터 시작해서, 종아리에 착 감기는 누디진 (Nudie Jeans)의 씬핀 모델, 보급형 아페쎄라 불리던 유니클로의 셀비지 진 외에도 수십가지 브랜드의 데님들이 나의 옷장 자리 한 켠을 차지하다 이내 사라졌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유행이 바뀌어도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클래식 데님이 있다. 아페쎄 (A.P.C)는 그런 브랜드다.

 

 

[워싱과 생지데님]

 

 

https://www.pinterest.co.kr/pin/112238215696617257/

 

 

그동안 다양한 브랜드들은 세월의 흔적을 인공적으로 표현한 워싱진을 소비자들의 개성이라고 마케팅하여 시장에 내놓았다.

하지만 아페쎄(A.P.C)는 깊은 바다 심연의 색처럼 블랙에 가까운 짙은 인디고 블루 컬러를 고집한 생지 원단을 고집한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진정한 워싱은 기계식으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페쎄가 생각하는 워싱은 자신의 생활 습관과 체형에 맞게 만들어지는 에이징이고, Raw 원단을 몇 년에 걸쳐 입어야만 만들어지는 자연스런 페이딩의 결과다.

 

 

https://www.parcelpal.com/2017/02/09/break-raw-denim/

 

수많은 데님 매니아들은 자신만의 데님을 원한다. 공장에서 찍어낸 일원화된 방식으로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규정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생지 원단의 데님에 워싱을 내기 위해서 24시간 같은 청바지를 1년 내내 입기도 한다. 주머니 워싱을 내기 위해 핸드폰과 차키, 지갑, 담배곽을 동일한 자리에 넣고 다녀야 하는 것은 그들만의 철칙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프링글스 뚜껑을 뒷주머니에 넣기도 한다.)

 

아페쎄는 유행이나 시대가 바뀌어도 옷장에 남길 수 있는 몇 안되는 브랜드다. 특히 아페쎄 생지 데님 팬츠를 좋아하는데, 생화 ㄹ습관에 영향을 받는 페이딩 덕분에 오래 입을수록 더 빛나는 물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을 빌려 아페쎼 생지 데님 팬츠를 소개하면 "멋지게 늙어가는 노신사"다. 그리고 그런 데님 팬츠를 만드는 아페쎄야말로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브랜드다. (마스자카 세이마, Name, Urself 디렉터)

- 매거진 <B>, ISSUE NO.78, 2019년 7/8월호, p116 -

 

 

[셀비지 데님]

 

1980년대 이후 데님 시장에 기술혁신의 바람이 불었다. 바로 균일하고 촘촘한 짜임새를 양산할 수 있는 기계식 방직기가 도입된 것이다. 그 후 많은 브랜드들은 베틀 방식의 셔틀 방직기로 원단을 가공하여 끝부분의 올이 풀리지 않게 안쪽에서 스티치로 마감하는 셀비지 방식을 버렸다. 셀비지 방식은 불규칙하게 원단을 엮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단단하고 거친 질감의 스트레이트 핏의 데님만 생산할 수 있다. 반면에 기계식 방직기를 활용하면 세심하고 촘촘하게 원단을 가공할 수 있다. 따라서 부드럽고 매끄러운 질감으로 스키니, 와이드, 부츠컷 등 다양한 핏의 데님을 자유자재로 생산할 수 있다.

 

셀비지 (Selvedge) 데님은 베틀 방식의 일종인 폭 90cm의 셔틀 방직기로 짠 원단의 양 끝부분 (edge)을 올이 풀리지 않도록 스티치 방식으로 마감한 데님을 가리킨다. 셀비지란 표현은 '셀프에지 (Self edge)에서 왓다. 1900~1960년대 미국 데님 팬츠가 데님 시장을 호령했을 땐 모두 셀비지 데님을 사용해 데님 팬츠를 만들었다.

- 매거진 <B>, ISSUE NO.78, 2019년 7/8월호, p1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페쎄는 셀비지를 고수한다. 특히 그들만의 양질의 원단을 사용한 데님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예술혼이 담긴 장인정신이 떠오를 정도다. 실제로 아페쎄의 데님을 납품하는 업체는 일본의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에 위치한 가이하라라는 업체이다. 1983년대에 설립된 이 직조업체는 1990년 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페쎄의 데님을 책임지고 있다.

 

정말 재미있는 것은 아페쎄 데님의 탄생일화에 있다. 아페쎄 창립자 장 투이투이는 여행 중 가방을 분실하여 급하게 여행동안 입을 데님을 사고자 현지의 샵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죄다 휘황찬란한 워싱과 촌스러울 정도의 핏이 전부여서, 차라리 직접 데님을 만들어야 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직접 데님 팬츠를 가봉하고 이를 재현할 수 있으면서, 자신과 동일한 철학을 지닌 업체를 찾고자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러다 알게된 업체가 가이하라였고, 현재 아페쎄와 가이하라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계약서를 쓰지도 않은 채 원단을 독점 공급받고 있다.

 

실제로 각각의 패브릭은 모두 성질이 달라요. 패브릭 안에 숨어 있는 과정들, 실을 직조하고 염색하고 어떤 구성인지에 따라 차이가 생기거든요. 아페쎄 데님의 비밀은 그 패브릭 속에 숨어 있습니다. 직접 그것을 만져보고 입어보지 않는다면 타사의 데님과 엇비슷하다고 밖에 할 수 없겠죠. (장투이투이, 아페쎄 창립자)

- 매거진 <B>, ISSUE NO.78, 2019년 7/8월호, p26 -
아페쎄 같은 브랜드는 처음입니다. 데님 업계는 지속적으로 신소재 개발에 힘쓰고 있어요. 디자인과 페이딩, 염색, 핏, 봉제 등이 시시각각 변하는 중입니다. 모든 브랜드가 트렌드에 발맞추어 자신들의 데님에 변화를 주는데, 아페쎼는 청므 생산한 데님의 색과 질감이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30년 가까이 변화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데님 업계가 아페쎄를 존중하는 이유입니다. (가이하라 마모루, 가이하라 대표)

- 매거진<B>, ISSUE NO.78, 2019년 7/8월호, p135 -

 

[갑옷같은 불편함 속의 아름다움]

 

아페쎄의 데님은 지독하게도 고집스럽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아페쎄의 청바지는 사실 처음에 굉장히 불편하다. 셀비지 방식을 활용하기 때문에 굉장히 두껍고 원단이 거칠다. 처음 옷을 받아 모양을 잡고 세우면 수직으로 설 정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페쎄의 데님을 '갑옷'에 비유하기도 한다. 게다가 아페쎄는 YKK 지퍼가 아닌 버튼플라이 방식을 고집한다. 단추를 채우다가 손가락이 부서질 것 같은 불편함이 있음에도 1900년대 아메리칸 데님의 오리지널리티 방식을 고수하는 고집인 것이다.

 

 

https://www.apetogentleman.com/best-raw-selvedge-denim-jeans/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규칙한 원단 짜임으로 생산된 셀비지는 입는 사람의 체형과 습관에 따라 자신의 몸에 딱 맞는 바지로 변모한다. 입으면 입을수록 편해지는 것이다. 옷이 사람의 몸에 적응하여 진화한다고 해야할까? 그만큼 아페쎄 데님은 오랜 세월동안 입을 수 있는 바지이다. 특히 전통 셀비지 방식을 증명하는 빨간색, 흰색, 청색 실이 나란히 이어지는 줄무늬의 마감 스티치는 그들만의 표식이다. 게다가 생지 원단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입으면 입을수록 에이징이 선명해지고 색감이 달라진다. 같은 바지이지만, 한달 전 입었을 때와 오늘 입었을 때의 바지는 서로 다르다. 무엇보다 그만큼 긴 세월을 함께하며 많은 추억이 담겨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페쎄 데님에 열광한다. 

 

 

[Simple is the best]

 

아페쎄의 데님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다른 모든 브랜드들이 차별성을 강조하고자 백포켓에 휘황 찬란한 시그니쳐 스티치를 새겨 넣는다. 갈매기 모양의 리바이스 스티치와 빨간 탭, 유려한 물결 모양의 스티치가 새겨진 누디진 등, "이건 우리가 만든 거야!" 라고 과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페쎄는 아무 것도 새겨지지 않은 그저 투박한 오각형 백포켓만 덩그러이 붙어있다. 얼핏 봐서는 저게 유니클로 바지인지 아페쎄의 바지인지 분간이 어렵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특히 페이딩과 색이 빠진 셀비지를 보면 사람들은 으레 '아페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을 버텨낼 수 있는 바지는 아페쎄 말고 없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아페쎄가 노리는 브랜딩 전략이다. 심플함과 베이직을 추구하지만 결코 단순하고 가볍지 않은 것. 자연스레 퍼지는 사람들 사이의 바이럴을 추구하는 조용한 과시의 우아함.

 

 

 

 

[아페쎄 창립자, 장 투이투이의 고집스런 브랜드 철학]

 

이 모든 것에 아페쎄의 설립자 장 투이투이의 고집스런 철학이 녹아들어가 있다. 브랜드 매거진 <B>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이 브랜드의 모든 행보의 근원이 어디서 출발하는지를 알 수 있다.

 

"아페쎄가 에센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름다움, 정확하게는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이 저희의 진정한 목표입니다."

- 매거진 <B>, ISSUE NO.78, 2019년 7/8월호, p26 -
"솔직히 저는 어떻게 하면 패션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실제로 과거에 그렇게 해본 적도 있죠. 몇 가지 확실한 트릭이 있거든요. 하지만 아페쎼는 그 길을 가지 않지요. 저희가 잘난 체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야심이 있기 때문이죠. 그것이 예술적으로 더 흥미롭다고 믿기도 하고요."

- 매거진 <B>, ISSUE NO.78, 2019년 7/8월호, p26 -
"미안하지만 저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고 싶진 않아요. 제가 인류애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요, 모든 사람이 저를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는 의미입니다. (...) 이 세상에 저와 같은 취향을 지닌 사람은 제법 많이 존재하고, 그건 아페쎼의 제품이 1년에 100만 개 가량 팔린다는 사실이 방증합니다."

- 매거진 <B>, ISSUE NO.78, 2019년 7/8월호, p26 -

 

장투이투이의 이러한 고집스런 철학과 진심은 브랜드에 그대로 반영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10년 넘은 아페쎄 데님을 옷장에 고이 모셔둔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수식과 본질. 심플함과 변주. 트렌드와 오리지널리티. 그 사이에서 수많은 브랜드가 갈팡질팡 하는 사이에 아페쎄는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클래식을 고수하는 고집있는 브랜드들은 소비자들을 선택하지 않는다. 구애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뚝심을 묵묵히 유지할 뿐이다. 그들의 오리지널리티 철학은 다른 브랜드를 가짜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소비자들은 역시 결국 클래식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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